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역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문단 편집) === 제6대 총선 (1969) === ||<-3> 1969년 9월 28일[br]{{{-2 총원: 496석, 과반의석: 249석}}} || ||<-2><#e20019> [[빌리 브란트|{{{#fff '''브란트'''}}}]] {{{#fff '''1기 내각'''}}}[br]{{{-2 {{{#fff '''254석'''}}}}}} || 야당[br]{{{-2 242석}}} || ||<#e20019> [[독일 사회민주당|{{{#fff 사회민주당}}}]] ||<#ffed00> [[자유민주당(독일)|{{{#000 자유민주당}}}]] ||<#000000> [[CDU/CSU|{{{#fff CDU/CSU}}}]] || || 224석 || 30석 || 242석[br]{{{-2 193석+49석}}} || 이 선거 결과 CDU/CSU보다 의석수가 적은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총리가 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 헌정 사상 원내 제2당 당수가 제1당 당수를 제치고 총리가 된 최초의 사례였다. 사민당의 브란트는 자민당과의 연정이라는 과감한 시도를 통해 제2당의 당수임에도 불구하고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이전에 대연정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간 제1당 당수가 총리가 되어왔지만 그 관례가 깨지게 되었다. 또 CDU/CSU 보다 고전적 의미에서 사실 더 우파적인 정당인 자민당과의 연정은 꽤나 파격적으로 받아 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이전 1961년, 1965년 총선을 거쳐 세번째로 총리직에 도전한 사민당의 당수 빌리 브란트는 [[68운동]]의 시대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젊은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기존 18개월의 병역 의무복무기간[* [[징병제/독일|독일의 징병제]]는 2011년에야 폐지되고 모병제로 전환되었다.]을 12개월로 줄이겠다는 공약 덕분에 젊은 자녀를 군에 보내야하는 부모들의 표심이 쏠린 측면도 컸다. 선거 결과 사민당은 4년전보다도 22석을 더 얻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CDU/CSU엔 부족한 의석수였고[* [[바이에른]]을 비롯하여 [[바덴-뷔르템베르크]], [[라인란트-팔츠]]와 같은 남부 일대는 기민련의 표밭이었고, 전통적인 사민당의 표밭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을 제외하면 [[동독]]으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브란트는 협상력을 발휘해서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과 [[자유민주당(독일)|자유민주당]]의 연정을 구성하는데 성공한다. 새로 수상이 된 [[빌리 브란트]]는 당시 서독의 주요 외교 정책이었던 [[할슈타인 원칙]](동독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외교 정책)을 폐기하고 [[동방정책]]을 내세우면서 많은 논란을 빚게 된다. 할슈타인 원칙은 이미 기민련 정권에서도 명분상으로만 내세웠지 현실 외교에서는 이를 주장하지 않은지 오래였지만, 이를 공식적으로 폐기하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브란트가 할슈타인 원칙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겠다고 한 것은 동독을 동등한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핵무기를 가지고 대치하고 있던 시절이라 할슈타인 원칙을 공식 폐기하겠다는 브란트의 정책은 서독 내에서 격한 논쟁을 불러왔다. 게다가 브란트가 [[1970년]] 모스코바 조약과 바르샤바 조약을 통해 2차대전 이전까지 독일의 영토였던 [[슐레지엔]]과 [[동프로이센]]을 포기하고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면서 서독 내에서 엄청난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심지어 이것은 서독의 영토도 아니었다. 물론 동독은 1952년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일찌감치 오데르-나이세 라인을 승인했다.] 이러한 외교 정책에 대해 [[매국노]]라는 비판까지 나왔으며,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연정 파트너 자민당은 물론이거니와 사민당 안에서도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다수의 자민당 의원과 사민당 의원들이 탈당하여 기민련으로 소속을 옮기는 사태까지 이루어진다. 1972년 4월 기민련 등은 브란트 정권에 대한 [[내각불신임결의]] 투표를 추진했지만 단 2표가 모자라서 부결되고 말았다. 내각불신임투표가 야당의 패배로 끝나며 브란트는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얼마 후 브란트 내각이 제출한 예산안이 부결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로서 브란트 내각의 국정 장악력이 상실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브란트 총리가 의회 장악력을 상실했다는 것이 명확해지면서 브란트는 식물 내각을 이끄는 대신 조기 총선이라는 정치적 승부수를 띄운다. [[1972 뮌헨 올림픽]]이 끝나자, 여당인 사민당을 통해 스스로 불신임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후 브란트는 의회 해산을 대통령에게 요청하고, 의회가 해산됨에 따라 총선이 한 해 앞당겨져 열리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